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성렬 교수 피살사건 (문단 편집) === 이상호,이정립 형제와 안세찬 === 증산계통 종교의 교조 증산 [[강일순]](1871~1909)에게는 여러 제자가 있었으나, 그중 가장 큰 교단을 만든 이는 단연 [[차경석]]이었다. 차경석이 세운 [[보천교]]는 일제강점기에 한때 300~500만 신도를 헤아렸다고 하니, 식민지 조선의 당시인구를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다. [[보천교]] 간부 중 이상호ㆍ이정립이라는 형제 신앙인이 있었다. 이상호는 한학에 밝았고 이정립은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였다. 보천교에서는 처음에는 [[강일순]]을 천사(天師)라고 부르며 신앙대상으로 삼고 개벽을 기다리며 도통을 바랐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심지어 교주 차경석조차 도통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차경석은 옛 스승이자 교조인 [[강증산]]을 기만적인 도인이라 생각하여 배제하고, 자기 아버지 차치구를 [[옥황상제]]로 모시며 교리와 의례를 유교화하여 보천교를 새로운 종교로 바꾸려고 하였다. 당시 보천교 고위간부였던 이상호ㆍ 이정립 형제는 이에 반발해 보천교 혁신운동을 일으켰으나, 차경석의 대응에 위협을 느끼고 [[만주]]로 피신하였다. 1936년에 차경석이 숨을 거두자 다시 국내로 들어와 강일순의 3번째 부인 고판례를 모시고 동화교를 개교했다. 한편 충청도 서산 지역의 부호로서 안병욱이라는 보천교 신자가 있었다. 안병욱의 장남 안세찬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강증산을 신앙하는 가풍 속에서 자란다. 안세찬의 회고에 따르면, 12세 때 '홀연히 영성이 열리는 큰 체험'을 하고 자신이 [[강증산]]의 뜻을 이으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http://www.jsd.or.kr/c/jsd/intro/341/396/342]]] 일제 치하였던 당시 안세찬은 징용을 피해 집을 나와 중국 및 만주 등지를 유람하며 견문을 쌓았다고 한다. 한편 이상호ㆍ이정립은 고판례와도 사이가 틀어져 결별한다. 이 무렵 안세찬은 해방을 맞아 자신과 함께 종교사업을 같이 할 동지를 찾아다니는 와중에 두 형제와 접촉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